영국 생활을 하면서 자연이랑 동물에 많이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올봄~여름 대부분을 웨일스 시골에서 지내면서 꽤 다양한 야생동물을 접했고, 그 덕에 산책하다 만나는 몇몇 조류의 종 이름도 익혔다. 😉 (걔네들을 한국어로 뭐라 부르는지는 모르는 게 함정ㅎ)
새들의 경우 보통 집 앞이나 정원에서 많이 봤지만, 지금 적으려는 몇 달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무려 집 안에서 벌어졌다. 유럽울새(꼬까울새; European Robin; Erithacus rubecula)가 변기 뚜껑 위에 똥 눈 이야기.
6월 2일 영국 시간으로 아침 8시 전후였다. 조시네 강아지를 정원 구석탱이 어딘가에서 일을 보게 한 뒤 집 안으로 들여왔고, 공기 순환을 위해 정원으로 나가는 프렌치 도어를 열어놨었다. 그리고 우리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대범한 로빈(유럽울새, European Robin) 한 마리가 이 열린 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으로 바나나+요거트+홈메이드 그라놀라를 먹으려고 했던 내가 요거트를 가지러 다용도실로 가기 전까진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주방에서 완전 반대편 끝에 있는 다용도실에 메인 냉장고가 있음)
유럽울새는 내가 영국에서 지내면서 많이 좋아하는 새 중 하나임이 틀림없지만, 막상 실내 공간에서 방황하는 날갯짓을 보니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당황스럽고 좀 무서웠다. 당황한 건 이 친구도 마찬가지. 유럽울새가 집에서 다시 나가려고 애쓰느라 엄청난 날갯짓을 보여준 거겠지만, 그걸 보고 나도 더 당황해서 어찌 도와줘야 할지 몰랐다.
이 새는 날갯짓을 계속 파닥파닥 하면서 엄한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우리가 있는 쪽으로는 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메인 냉장고가 있는 다용도실로 날아가 헤매고 있길래, 얼른 따라가서 다용도실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문은 열어두고, 집안이랑 연결된 문은 닫아두고 기다렸다.
아, 결국 요거트는 못 가져왔다. 냉장고 문 연 사이에 거기로 날아 들어갈까 봐… 아침은 바나나+그라놀라로 끝내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다용도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다행히도 방황하던 로빈은 열어둔 바깥문을 통해 나갔다.
다만…
다용도실에 있는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 볼일을 보고 나갔다.
모닝 해프닝은 이렇게 끝났다. 듣기로는 이 로빈이 며칠 전부터 프렌치 도어 쪽에 있는 야외 테이블 근처에서 서성였다고 한다. 이날 아침에도 먼저 일어난 조시가 이 테이블 위에 로빈이 있던 걸 보고 날 불렀는데, 로빈이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조금 거리가 있는 나무 위로 날아 올라갔다.
굉장히 호기심이 많거나, (정원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의 집도 본인 영역으로 만들고자 했던 야심 찬 유럽울새였던 것 같다. (근데 막상 들어오니 overwhelming 해서 다시 나가고 싶었는데 출구를 못 찾아서 당황+긴장하고 스트레스받아 집안에 실례를…)
인간의 입장에선 ‘아침에 로빈이 우리 집 화장실에 큰일 보고 간 썰’인데, 이 유럽울새 입장에서는 어떤 스토리로 기억될까…..?
이날 이후로 한동안은 로빈의 대범함은 볼 수 없었던 거로 기억하나, 마치 곧 잊어버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처럼, 정원 중앙의 나무/덤불에서 드문드문 집 쪽을 바라보던 걸 목격했다. 로빈은 여러모로 캐릭터가 참 확실한 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