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오소리, 여우, 고슴도치를 하룻저녁에 전부 다 만난 운이 좋았던 밤 (2)
오후 4-5시 사이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물은 미니 사다리, 플랫 시트(flat sheet), 망원경 2개, 헤드 토치, 샌드위치용 슬라이스 햄에서 지방 부분 & 미트볼! 그리고 야생동물은 우리보다 후각이 예민하니까 체취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 맨 물 샤워도 했다. (샤워젤을 쓰면 또 그 향이 날 수도 있으니까 ㅎㅎㅎ)
6시쯤 파스타로 저녁을 금방 끝내고 미리 챙겨둔 짐을 들고 드디어 탐험을 나갔다. 준비하고 보니 계획보다 출발이 지연돼서 좀 걱정됐지만, 가능한 한 빨리 가는 수밖에…. 허허
산림길 주변에 차를 대놓고 조시는 미니 사다리와 flat sheet를, 나는 나머지 준비물이 든 배낭을 메고 전에 물색해둔 입구로 향했다. 해는 이미 많이 졌지만 그래도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조시를 따라 걸은지 오래되지 않아 지난번에 우리가 이름 붙인 ‘Badger City’에 도달했다. 조시가 햄 지방이랑 미트볼을 오소리 길목에 흩뿌리는 동안 나는 우리가 대기 탈 곳에 짐을 풀었다. 쓰러진 나무 기둥 위에 앉고, 그 바로 옆에 있던 다른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ㅎㅎㅎ 이제부터는 자연의 소리에 집중하면서 무한 대기하는 일만 남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무작정 기다리기. 체력 & 인내심 테스트로 제격이다.
간간이 들리는 올빼미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같은 바람에 도토리가 톡톡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까보다 더 어두워지면서 그나마 흐릿하게 보이던 풍경도 이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각종 소리를 듣고 추측하는 것에 몇 배로 더 집중했다. 무언가 스스슥 움직이는 소리가 날 때면 설렘+긴장+흥분+무서움이 섞인 감정이 일어났다. 두 눈을 더 똥그랗게 뜬다 해도 딱히 더 보인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을 좌우, 위아래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소리의 정체가 뭔지 알아내려고도 해봤다. ㅋㅋㅋ
그렇게 청각에 의존해 기다린지 한 한 시간쯤 되었나? 싸늘한 공기가 춥게 느껴졌고 아무런 흔적도 못 볼 것 같아 조시한테 ‘이제 갈까?’ 하는 사인을 보냈다. 조시가 5분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해서 오케이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
마지막 5분이 다 되어가던 찰나에 조시가 다급하게 날 툭툭 쳤다.
???
어?? 야생 오소리다!!!
빛을 쏘지 않고는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웠는데 (나는 그저 스마트폰 유저일 뿐이니깐…) 조시가 가리킨 곳을 망원경으로 보니 꽤 큰 덩치의 무언가가 움직였다. 대부분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여서 너무 아쉬웠지만, 그 와중에도 오소리의 머리 쪽에 난 흰 줄무늬는 선명히 보여서 우리 둘 다 이건 오소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래 무료 사진에서 보이는 두 눈 사이 얼굴을 가로지르는 저 흰 줄!)
We’re so lucky!!
오소리가 햄이랑 미트볼을 맘 놓고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조용히 짐을 챙겨서 산림 밖으로 나오자마자 신이 난 조시가 말했다. ㅋㅋㅋㅋ 그도 그럴 것이, 집터, 배변 공간 (+freshness), 트랙 등의 활동 흔적을 가지고 야생 오소리를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은 지점을 추측한 것이 첫 시도만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완전 교과서같이 클래식한 성공 사례였다. 게다가 오소리가 야생에서 실물로 만나기 그리 쉽지만은 않다고 한당!
조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신나게 이야기해드릴 수 있겠다고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두 분 댁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타운에 가까워갈 때 도로 위를 재빠르게 횡단하는 여우도 봤다. 사실 여우는 여기서 자주 봐서 막 엄청 대박대박! 할 거는 아니었지만 ㅎㅎㅎ 오소리 보고 얼마 안 지나서 또 여우도 봐서 신났다. 댁에 도착해서 야생 오소리 본 썰을 열심히 풀었다. ㅎㅎㅎ
내 최애 야생동물이 작년 생일 이후부터는 고슴도치였었는데, 그때 조시 덕에 방문했던 야생 고슴도치 병원에서 말고는 사실 야생 고슴도치를 실물로 본 적이 없었다. 음, 물론 병원에서 본 애들도 야생 고슴도치긴 했지만… 구조되어 치료 중인 애들만 보고 자연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고슴도치는 못 본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야생 오소리를 보고, 고슴도치에 대한 나의 충성심이 살짝 줄어들고 오소리가 그 자리를 꾀하려던 차였다. (오소리 이야기로 끝난 줄 알았지만 아님ㅋㅋㅋㅋ)
그런데 내 흔들리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 마냥, 집 도착하고 한 시간쯤 지나 야생 고슴도치가 나타났다! ㄷㄷㄷ
짐도 다 풀고 오소리 관찰한 이야기도 끝냈고, 신나는 마음 가라앉히고 슬슬 잘 준비해야겠다 싶은 순간이었는데 conservatory (식탁 & 독서용 소파가 있고 정원으로 나가는 문이 있는 공간)에서 문 살짝 열어두고 다른 일하고 있던 조시가 나를 불렀다. 고슴도치 킁킁대는 소리가 꽤 가까이서 났으니 아주 조용히 따라 나와보라고 했다. ‘헐, 설마, 대박’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맨발로 따라나서서 조용히 bird bath 쪽으로 다가갔다. 오소리 보러 갔을 때 썼던 red light 헤드 토치로 마지막으로 소리가 들렸던 곳을 조심스럽게 비추어 보았다. (핸드폰 손전등보다 훨씬 더 연하고 붉은빛을 쏴서 고슴도치한테 덜 방해되지 않을까 함)
대박 ㅠㅠ 진짜 고슴도치야….
우리가 여전히 롱디하던 때인 작년 늦여름, 조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에서 두 번 발견됐다고 이야기만 전해 들었던 그 야생 고슴도치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고슴도치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가시를 세우고 경계해서 얼른 사진 찍고 다시 실내로 들어왔다. 온갖 오두방정 호들갑을 떨면서 다시금 고슴도치에 대한 나의 애정을 충전했다. 힝구 고슴도치야 잠시나마 너를 소홀히 해서 미안행 (이 고슴도치가 밀당의 고수였단 걸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어…..)
9월 15일 저녁 오소리 관찰 (+ 여우, 고슴도치와의 우연한 만남)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