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쯤, 가는 길마다 도토리가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서 갑자기 도토리묵이 당겼었다. 한인마트에서 도토리 가루를 살 수 있긴 했지만, (손이 많이 간다 해도 맛은 비교가 안 된다는) 수제 도토리 가루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유튜브에서 미국에 사는 분이 올려두신 관련 영상을 봤는데 정말 손은 많이 가지만 어려운 것 같진 않았다.
조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 정원에 참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풀 위로 도토리가 너무 많이 떨어져서 주기적으로 골라내시니까 내게는 도토리묵을 만들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두 분께 도토리묵을 acorn jelly로 밖에 설명을 못 해서인 것도 있겠지만, 쓰기만 한 도토리 커피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도토리묵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으셨다. ㅋㅋㅋㅋㅋ) 정원에서 10-15분 만에 큰 통의 한 2/3 정도를 채웠고, 속이 비거나 썩은 것 같은 것도 골라내고 도토리를 잘 씻어냈다.
결론으로 바로 넘어가면, 내 첫 도토리 가루 만들기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믹서기에 갈아내지 않은 온전한 도토리들은 다시 자연에 돌려보내기로 했다. 처음엔 기대에 못 미친 결과에 조금 속상했지만, 이 덕분에 Tom을 알게 되는 에피소드가 생겼다. ㅎㅎ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이전에 블랙베리를 따러 갔던 그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서 곳곳에 도토리를 뿌려주기로 했다. 산책길 끄트머리에 있는 언덕배기에 뿌리면, 그중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참나무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였다. 대다수는 다람쥐나 다른 동물들 겨울나기 양식으로 쓰이겠지만 ㅋㅋㅋ
산책용 길이 난 양옆으로는 사유지인데, 양을 키우는 필드로 쓰여서 종종 한가로이 풀 뜯어먹는 양들을 보기도 한다. 이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는데, 다만 다른 날에 비해 양들이 산책길 옆 울타리 쪽으로 유난히도 가까이 와서 밥을 먹고 있었다. 엄청 가까이서 양을 볼 수 있어서 신기하고 귀여워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아저씨가 나타나서 우리를 부르며 가까이 와보라고 했다. 괜히 쫄아가지구 ‘아 사진 찍는 거 싫어하시나?’, ‘당신 양들한테 해코지하고 있다고 오해하셨나?’ 등의 생각을 하며 살짝 긴장한 마음으로 걸어갔다. 다행히도 그게 아니고 ‘도토리 먹는 양 봤느냐’라며 양 한 마리를 콕 집어 소개해 주셨다. ㅋㅋㅋㅋ
이 양은 특별히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톰(Tom)! Tom은 농부 아저씨가 애지중지하시게 된 계기가 있는, 출생에 사연이 있는 양이었다.
올해 초, 겨울 Tom을 포함해 다른 형제를 임신해 있던 만삭의 어미 양이 어느 날 밤 울타리를 넘어 탈출했다. 농부 아저씨가 어미 양을 찾았을 때는 이미 출산을 한 상태였는데, 날도 춥고 시간도 좀 지났는지 어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고 Tom은 그런 어미젖을 물고 있었다고 한다. ㅠㅠ Tom의 다른 형제 중 한 마리도 어미 양이랑 함께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농부 아저씨는 이 아기 양과 어미 양은 농장 부지에 묻어두고 Tom은 집 안으로 데려와 정성껏 돌보셨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Tom은 농부 아저씨네 집에서 사랑 듬뿍 받으며 자라서 아저씨 목소리도 알아듣고 신기하게도 도토리도 먹는다! Tom은 밭에서 풀 뜯고 있다가도 아저씨가 부르시면 울타리 쪽으로 쫄래쫄래 와가지고 도토리를 달라고 보챈다고. ㅋㅋㅋㅋ 다른 양들은 관심 없는데 유독 Tom은 도토리를 끊임없이 갈망한다고 한다. 그런 Tom이 암컷 양 한 마리에게 도토리의 맛을 소개해 주었는지 딱 이 두 마리만 도토리에 관심을 갖고 당신을 찾아온다고 하셨다. (따라온 암컷 양도 Tom처럼 도토리를 엄청나게 원하는 눈치는 아니고 던져주면 두어 개 정도 먹음)
농부 아저씨가 Tom한테 도토리 먹여보라고 하셔서 나도 Tom에게 도토리 몇 개를 줘봤다! Tom이 그동안의 세월(?) 동안 농부 아저씨한테서 도토리를 받아먹는 게 숙련이 되었는지, 내가 줘도 깔끔하게 도토리만 쏙 이빨로 집어서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었다. ㅋㅋㅋ 아저씨 말대로 사람들이 땅콩 간식 먹는 것처럼!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굿바이 인사할 때가 돼서야 서로 통성명을 했다. R 아저씨가 이 길 따라 산책할 때 Tom 보면 언제든지 도토리 줘도 괜찮다고 해주셨다. ㅋㅋㅋㅋ 그때가 생각나서 얼마 전에 산책길 지나면서 Tom을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그 밭엔 Tom을 포함해서 아무 양도 없었다. 양들이 다른 밭에서 새로운 풀을 뜯을 수 있게 옮기신 것 같다. 다음에 같은 길 지나갈 때 R 아저씨와 Tom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너무 반가울 것 같다.. ㅎㅎㅎ
이외에도 R 아저씨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젠 농부 일한 지도 10년 정도 됐지만, 처음 시작할 땐 지식과 노하우가 없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부터 시작해서… ‘근 10년 사이 기후 변화를 심하게 체감한다’까지… ㅠㅠㅠ
도토리를 도로 땅에 던져두려고 가볍게 나섰던 산책길에 농부 아저씨의 생생한 이야기도 듣고, 도토리 먹는 양도 만나고, 그 양한테 도토리도 직접 먹여본 예상 밖의 순간들로 채워진 2020년 10월 1일의 오후였다. :’)